책리뷰

생의 한가운데 _ 루이제 린저

Walnut 2008. 2. 2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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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19)

Image from 교보문고


삶, 죽음, 행복, 외로움.. 많은 것들을 생각하면서 읽을 수 있었던 책이다. 그래, 우리는 참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어떻게 딱 한가지로 정의 내릴 수 없는 수없이 다른 모습으로 말이다. 니나, 슈타인, 그리고 니나의 언니 마르그레뜨를 통해서 참 많은 것들을 공감하고, 반대하고, 반성하고 그럴 수 있었다.

니나부슈만. 지독히도. 그래, 지독히도라는 말을 쓰고 싶다. 그녀는 지독히도 자유를 갈망했다고. 어딘가에 속박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삶에 대한 열정이 있었고, 자신의 삶을 위해서 뭐든지 할 수 있는 모험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슈타인. 평생 한 여자를 사랑한. 하지만 그저 사랑만 했을 뿐이다. 나역시 그것이 사랑이었는지 의심이 간다. 그 사람에게 니나는 그 사람의 삶의 전부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는 언젠가 니나가 보게될 일기를 매일같이 썼다. 하지만 그는 니나를 사랑했다기 보다는 니나를 목표로 자신과는 너무나도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녀를 동경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든다...

24p. 이따금 나는 아직 인기척이라곤 없고 모든 것이 회색인 이른 새벽 잠을 깹니다. 그러면 공포가, 목을 조르는 듯한 공포가 다가듭니다. 삶에 대한 공포, 살아야 한다는 것에 대한 공포. 그럴 때면 어떤 위대한 것에 대한 상념도, 신에 대한 상념까지도 내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인간은 이 공포 앞에서 완전히 혼자일 뿐입니다. 가장 무서운 공포의 순간이 지나고 나면, 그 공포의 전체가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애씁니다. 나는 물론 몇 개의 답을 찾아냅니다. 그것은 우선 내가 이 생에서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으리라는 , 그 어떤 훌륭한 것도 이룰 수 없으리라는 것에 대한 공포입니다. 그리고 내 생명을 되는 대로 흘려보내고 진실되게 살지 못하리라는 공포입니다. 또한 내 자신이 어떤 잘못을 범하고, 그 잘못이 나의 발전을 영원히 좁은 범위 안에 머무르도록 결정지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입니다. 하지만 내 안에서 무슨 훌륭한 것이 나오겠습니까! 이 무슨 교만입니까!

31p. '내 생각엔 인생의 의미를 묻는 사람은 결코 그것을 알 수 없어요. 그 대신 한 번도 그것을 묻지 않는 사람은 그 해답을 알고 있는 것만 같아요.'

51p. "나는 죽고 싶어요. 이해하시겠어요? 사는 것보다, 여기서 이렇게 사는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게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에요. 사람들은 공부하고 먹고 자고 일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지요. 이런 것들이 다 뭐지요? 이것만으론 모자라요. 사람들은 단지 그것에 익숙해져서 거기에 의미가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타이르는 것뿐이에요. 물론 그 것밖에 모르고 또 더이상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에겐 의미가 있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내가 어떻게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단 말이에요? 멋진 순간이 우리의 삶에 존재한다는 걸 나는 책에서 읽었어요. 사랑을 하거나 아이를 낳거나 어떤 진리를 발견하는 순간이 그렇다는군요. 하지만 그런 건 지속적이지 못해요. 단지 아주 조금 맛보기로 구경만 하고는 다시 빼앗기고 말지요. 난 그걸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어요. 그래서 난 죽고 싶은거예요. 이해하시겠어요? 그러니깐 선생님은 내게 모든 것을 다 사실대로 말씀하셔야 해요."

56p. "덕분에 난 무섭도록 많은 것을 알게 된거야. 마치 걸신들린 사람처럼 미친 듯이 배웠어. 죽음이 날 데려가지 않았으므로 나도 더 이상 죽음을 기다리지 않게 되었지. 삶의 편으로 돌아선거야. 그런데 그 무렵 내게는 산다는 것은 아는 것, 무섭도록 많이 아는 것과 생각하는 것과 모든 것을 파고드는 것을 뜻했어. 그것만이 전부였어."

71p. "난 때로는 보다 덜 이성적이 되어 굉장히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무지무지한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면 무엇이든 아까운 게 없을 것 같아."
내 말에 니나는 끔직하다는 듯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그런 걸 바라지 마. 그런 것이 닥쳐오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겠지. 하지만 그걸 바란다는 것은 경박한 짓이야."
니나는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늘 너무 많은 걸 걸어야 하니깐 위험하거든."
"아, 하지만 때때로 모든 걸 내던져 버릴 만큼 위험이 없는 인생이란 가치가 없어."

72p. "아니, 그렇지 않아. 난 이대로가 좋아. 난 안정을 바라지 않아. 아무런 불만도 없어. 이따금 저녁 무렵 특히 여름날 저녁 때 산책을 할 때면 뜰에 불이 켜지고 라디오 소리가 들리는 집 안을 들여다볼 때가 있어. 그 안에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는 모습을 말이야. 그럴 때면 난 가족과 내게 다정하게 대해주고 내가 믿고 의지하고 밤에 날 안아줄 남자에 대해 지독히도 강렬한 그리움을 느끼곤하지. 야트막한 울타리에 기대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며 생각하곤 해. 난 지금 까지 대체 몇 번씩이나 운명으로부터 그것을 제공받고도 거절해 왔던가를. 대체 왜 그랬는가를. 어쩌자고 난 떠돌이 개처럼 이렇게 여기에 서 있는가? 물론 내게 이런 모든 것을 주지 않은 것은 운명이나 그 밖의 것이 아니었어. 그것 바라지 않은 것은 바로 내 자신이었지. 그런 건 날 위해 있는게 아니었어."

73p.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는 밤낮으로 그의 삶을 꽉 채우고 있는 일이 있었고, 게다가 그에게 생기를 주는 사랑을 가지고 있었어. 내 생각엔 행복이란 우리가 언제나 생기를 지니는 것에 마치 마친 사람처럼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듯, 무슨 일에 몰두하고 있는 가운데 존재하는 것 같아."

82p. "언닌 그런 경험 없어? 어느 날 문득 잡에서 깼을 때 자신이 전날과 아주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경우 말야. 갑자기 걸음걸이도, 글쓰는 것도, 말투도 달라진 경험이 있느냐구. 다른 사람의 눈에는 잘 띄지 않지만 스스로는 너무나 명백하게 깨닫는 변화지. 자기 자신이 이렇게도 될 수 있고 저렇게도 될 수 있고, 또 전혀 다르게 될 수도 있다는 걸 느끼게 되지. 변신도 가능하고 자기 자신과의 유희도 가능하지. 책을 읽을 때는 거기에 등장하는 이 사람이나 혹은 저 사람에게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또 다른 책을 읽을 때는 또 다른 모습의 자기와 만나게 되고- 이런 일이 끝없이 이어지지. 사람은 누구나 시선을 안으로 돌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면 수백 가지 모습을 하고 있는 자기를 볼 수 있어. 하지만 그 중의 어느 하나도 진짜는 아니야. 어쩌면 그 수백 가지를 다 합치면 진짜가 될 수도 있겠지.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러면서도 우리는 적어도 스스로 원하는 것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어. 문제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이 수많은 것 중에서 미리 정해진 어떤 하나일 뿐이라는거야."

131p. 얼마 전 당신을 찾아갔을 때 나는 이야기할 게 많았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그것은 아주 무의미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입니다. 자기 자신에게라도 안 되는 것이지요. 설령 마음을 털어버리고 나면 우리는 이전보다 훨씬 더 가난하고 두 배나 더 고독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속을 털어 놓았아고 해서 그 사람과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환상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침묵 속의 공감밖에 다른 방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136p. "대부분의 사람들은 운명을 갖고 있지 않지. 그것은 그들 탓이야. 그들이 원하지 않으니까. 커다란 한 번의 충격보다 자잘한 백 번의 충격을 받아들이지. 커다란 충격만이 우리를 앞으로 끌어가는 걸 사람들은 물라. 자잘한 충격들은 우리를 진창으로 몰아넣지만 그건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아. 거기서 비롯되는 타락이 오히려 편하니까.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건 마치 파산 직전의 사업가가 여기저기서 돈을 꾸어다가 간신히 파산의 위기를 모면한 다음 평생 동안 이자를 갚아나가느라 전전긍긍하는 거나 다름이 없어. 난 언제라도 당당하게 파산을 선언하고 새로 시작하는 편을 택하겠어."

139p. 나는 아침의 활기와 신선함이 넘치는 거리를 내려다보다가 까닭모를 우울에 사로잡혔다. 사람들은 저렇듯 매일 새로운 희망을 안고 하루를 시작한다. 이어서 낮이 오고 밤이 된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그저 판에 박은 듯한 일상이 한 번 더 지나갔다는 것밖에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언제나 똑같은 일상의 되풀이인 것이다.
나는 스스로의 생활을 돌이켜보았다. 내 생활에는 특별한 위기도, 돈 걱정도 없다. 그저 약간의 자기 기만과 동정심이면 해결될 자잘한 일 밖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조용하고 아름다운 생활이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더 이상은 싫다.

154p. "독자라구! 독자가 원하는 건 재미야. 그리고 작가는 따라가기 쉬운 편한 이야기를 제공해야 하는거야. 처음은 이렇고, 다음은 저렇고. 그리고는 해피 엔딩이든 아니든 원만한 결말이 필요하지. 마치 영화처럼 모든 것이 아주 매끄럽게 진행돼야 하는 거야.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자기를 리얼리스트라고 생각하지. 실제로 우리 생 앞에는 어떤 계산서도 들어맞지 않고 아무런 결말도 없는데 말야. 결혼도, 죽음까지도 결말은 아니야. 인생은 그저 흘러갈 뿐이야. 모든 것은 그렇게 서로 뒤얽히고 아무 논리도 없고 즉흥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어떻지? 거기에서 작은 조각을 끄집어 내서 현실에서는 존재하지도 않고 인생의 복잡성에 비하면 우습기 짝이 없는 조그만 설계도에 따라 알뜰하게도 건축하고 있어. 모두 다 꾸며진 사진에 지나지 않아. 내 소설도 마찬가지야."

159p. "과장은 언니보다는 내 전유물인 줄 알았더니. 내가 말하려던 것은, 우리 모두는 조심할 필요가 있으며 어느 경우에도 안심을 해서는 안된다는 거였어. 모든 피조물이 다들 그렇게 살고 있어. 언니는 한 마리의 새가 되고 싶지 않아? 하지만 고양이, 독수리, 족제비, 개구쟁이 어린이들. 이 모든 것들이 다 새를 노리고 있지. 새는 그 한가운데 살면서 새끼를 키우고 잠시도 둥지에 한가하게 붙어있질 못해. 새를 한 번 자세히 봐. 언제라도 도망 갈 준비를 갖추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겁에 질려 앉아 있는 걸 볼 수 있을거야. 온 세상이 노려보는 가운데서도 새는 노래를 부르지."

160p. "그렇다면 넌 우정 같은 것도 믿지 않겠구나?"
나는 이어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사랑도?"
니나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언니한테 말했잖아-우린 그 많은 위험 속에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소리 없이 살아가고 있다고."
니나는 이어서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은 소리로 재빨리 덧붙였다.
"특히 사랑에 있어서는, 사랑에 있어서는 특히 더 그래."

162p. "언니는 이런 감정 가져본 적 없어? 자기가 애착을 느끼던 모든 것이 느닷없이 끔찍하게 싫어지는 거. 단 하루도 참을 수 없을 만큼. 전과 달라진 건 하나도 없어, 방안도 집도 거리도. 그런데 별안간 그 모든 것이 변한 것 같고 견딜 수 없이 쓸쓸하고 적의를 드러내는 것처럼 생각되는거야. 그럼 떠나는 길밖에 없어. 한 순간도 머무르지 말고 떠나야 할 때가 온거야. 우린 이미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모든 것에서 스스로를 끌어내 간거야. 사물은 스스로 사는게 아니라 우리가 그들을 보고 있으니 사는 것뿐이거든."

193p. "그렇게 앉아 할머니를 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제 자신의 모습이 보였어요. 늙고 퉁퉁 부어서 거의 반쯤 죽은 상태의 내 자신을 본다는 것은 정말 끔찍했어요. 느닷없는 공포가 덮쳐와서 얼른 밖으로 뛰쳐나가 뒷마당으로 갔어요. 거기에는 내가 심어놓은 달리아와 국화가 꽃을 활짝 피우고 있었어요. 꽃들을 바라보며 생각했어요. 넌 지금 아주 중요한 인식과 적나라한 진실을 회피하고 있는거다. 어서 다시 들어가 저 노인과 너 자신을 바라보아라. 소름이 끼친다 해도 네게 해가 되진 않는다. 그것도 다 삶의 한 부분이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경험해야 한다. 추악한 것을 회피하려 든다면 중요한 것도 보지 못하는거야. 그래서 나는 다시 집안으로 들어왔고 마침내 할머니의 임종을 볼 수 있었어요. 할머니가 죽는 것을 보았다기보다는 느꼈어요. 할머니는 갑자기 몸을 높게 일으켜 앉아 두 손을 의자 등받이에 얹었어요. 마치 일어서려는 듯이. 고개를 쳐들고 눈을 크게 뜬 채 할머니는 무엇을 보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만 있다며! 할머니는 분명히 무언가를 보고 계셨어요. 진지하고 심각하게 바라보던 할머니는 미소를 지었어요. 아니 어쩌면 얼굴을 찡그린 것이었는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뭔가 기쁨에 찬 듯한 표정이었어요. 그러더니 갑자기 천식이 발작된 듯 숨이 막히기 시작하다가, 마치 시계의 태엽장치가 멈추듯 기침이 멈추었어요. 몸이 다시 오그라들고 뒤미처 죽음이 그 손길을 내밀었어요. 할머니의 몸은 그대로 썩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틀만에 바로 매장해야 했어요. 아무튼 돌아가지기 직전의 그 몇 분간의 아주 중요했어요. 난 그것을 알아요. 할머니는 그 때 뭔가를 보았는데 그것이 할머니의 종말에, 생의 마지막에 어떤 의미를 주었지요. 나로선 인간이 죽는 순간까지 기만당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요. 할머니에게 뭔가 만족감을 주는게 분명 있었어요. 하지만 어째서 우리는 그것을 그렇게 뒤늦게야 알게 되는 걸까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건 바로 그 부분이에요."

209p. "난 벌써 오래 전에 단념했어. 그것 때문에 무척 애먹었어. 늘 나를 뒤쫓고 있는 뭔가가 있었거든. 밤새워 다 써야 할 글이 있다든지, 그 밖의 어떤 일이 언제나 내게 요구되었기 때문에 난 언제 이 모든 것이 다 끝날 것인지 막막했어. 그러면서도 한 번도 완벽하게 행하지 못했고 늘 뛰어 오를 준비뿐이라는 생각, 마치 담벽을 올라가려고 애쓰다가 번번이 미끄러져 발톱이 빠지고 상처를 입는, 그러면서도 되풀이해서 시도하는 가엾은 개와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해. 그리고 또 언제나 나는 충분히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으며, 내가 해야할 일을 다 하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잠시도 떠나지 않는거야. 성공에 대한 불안감이지. 극히 짧은 순간, 손 안에 쥐고 좀 기뻐할라치면 이미 없어져 버리고 마는거야. 의문스럽고 무상한 것을 기뻐할 수가 없고, 또 새로운 착상이 나를 괴롭히기 때문이야. 수많은 자잘한 불안들. 아이들이 기침을 하거나 한 아이가 거짓말을 했을 때는 그애가 잘못 될까봐 초조해지지. 그리고 또 아무일도 없을 때는 여태까지 뒤에 물러서 있던 보다 큰 유령이 등장하는거야. 지금까지 이 세상에 나와 있는 너무 많은 책 때문에, 그리고 떠돌아다니는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 때문에 숨이 막힐 것 같아.
온갖 아름다운 것은 눈 깜박할 사이에 지나가 버리고 만다는 것도 슬퍼. 완전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 정말이지 이 세상에 완전한 것이란 아무것도 없어. 심지어 완벽하게 순수한 절망조차 나중에 보면 싸구려 혼합물일 뿐이야. 인간은 행복할 수 없어. 그렇다고 행복을 포기함으로써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야. 이 모든 생각이 늘 내 내부에 깔려 있는거야. 그것들은 늘 내 생활에 어떤 완전한 것이 둥장할 때마다 나타나서 내게 말하는 거야. 아니야, 이건 너에게 어울리지 않아, 너의 법칙은 그저 계속해서 앞으로 나가는 것 뿐이야, 라고 말이야. 그럴 땐 울고불고 반항해도 소용이 없어. 그대로 그 삶에 끌려가는 도리밖에."

222p. 나는 종종 일어나 문을 연다. 밖에는 아무도 서 있지 않다. 우편물을 열심히 챙기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것도 없다. 수화기를 들어본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거리에 나선본다. 여전히 아무와도 부닺치치 않는다. 차에서 내린다. 이 도시에서 나는 혼자다. 그러나 뭔가를 기다리고 있고 기대에 넘쳐 있다. 나는 그것이 '행복'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왜? 그것은 행복이 아닐지도 모른다. 행복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도 나는 행복을 기대한다. 무슨 권리로 이 세계에서 나만은 예외이기를 바라는가? 누구에게도 소망이 이루어지는 일이 없는데도 어째서 내 소망만은 이루어져야 한다고 기대하는가? 내가 이처럼 끈질긴 인내심으로 그것을 쫓기 때문에? 누구도 공적에 따라서 보상받지는 않는다. 그리고 누구도 타인의 노력을 존중하지 않는다.

333p. 나로선 완전히 절망한 인간이 죽음을 결심하고 나서 그처럼 분명하고 담담하게 편지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난 그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끔찍하게만 느껴졌다. 니나의 편지가 혼란스럽고 한탄조로 씌어졌다면 나는 오히려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니나는 무서울 만큼 자신을 억제하고 있었다. 이제야 나는 며칠 전에 니나가, '한 사람이 많은 힘을 갖는다은 것은 위험한 일이야.'라고 했던 말의 진실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쨌든 나는 니나가 절망한 것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표시한 것에 대해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모든 괴로움을 감추고 어떤 일이 있어도 태연한 자세를 유지한다는 것은 보다 위대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번쯤 약해지는 것이 더 인간적이지 않을까?
나는 너무 긴장하며 살아가는 인간은 거의 얻는 것이 없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어쩌면 내가 살아가는 태도도 그렇게까지 잘못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조금은 타성적이고, 생각이 단순하고, 나 자신에 만족하면서 특별한 정열도 없이 사는 생활 그것도 그리 나쁘진 않을 것이다.

340p. -10년이 지난 지금에야 비로소 나는 그 진짜 이유를 알았다. 아니 그보다 나 자신이 그것을 시인한다. 그 이유는 너무도 우스꽝스럽고 창피스럽고 심각한 것이었다. 니나가 자유를 얻고자 했을 때 내 앞에는 느닷없이 그녀를 손에 넣을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고, 그것은 무서울 정도로 유혹적이었다. 그러나 전에도 그랬고 나중에도 그랬던것처럼 나는 그러한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10년 전 나는 지금처럼 내 자신을 잘 알지 못했다. 따라서 그때 나의 맹렬한 폭발이 사실은 니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향한 것이었음을 몰랐던 것이다. 니나에 대한 투쟁이 사실은 한 여자를 향한 것이 아니라 내 본질의 특수한 방향을 향한 발전과 인식을 위한 투쟁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어떤 여자를 선택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의 본질 가운데 어떤 가능성을 선택할 것인가가 문제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내가 부정하려고 했던 나의 본질 가운데 일부분과 하나의 가능성을 니나가 구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349p. "당신은 강한 힘을 지녔소. 하지만 너무 많은 모험을 하려는 여자는 늘 손해를 보는 법이오."
니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럼 날더러 살지도 말라는 말이에요? 내가 지금까지 살아 보았던가요? 난 살고 싶어요, 난 삶을 사랑해요. 물론 당신은 이런 나의 마음을 이해 못하실거예요. 당신은 한번도 진짜로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당신은 이제껏 삶을 피해가기만 했어요. 한 번도 위험 속으로 들어가 본 적도 없구요. 그래서 얻은 게 뭐지요? 당신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어요. 늘 잃기만 했을 뿐이에요."

362p. 나는 지금까지 전율을 느끼며 내 주변의 인간들이 변화해 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이런 시대를 이겨낼 힘이 없다. 그러나 니나라면 그런 나를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니나는 내가 시대와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을 책망할지도 모른다. 난 정말 그런 인간인가? 그게 사실인가? 도대체 도피하는게 누구란 말인가? 쫓겨난 자들과 더불어 정처없이 해안을 달리는 그 사람들인가? 아니면 한 때 가치 있던, 아마도 영원히 그 가치를 지닐 그런 것을 지키기 위해 자기 자리를 떠나지 않기로 한 사람들인가?

368p. "아니, 그렇지 않았소. 당신은 그 문을 열고 있었지만, 그것도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자주 그리고 오래 열고 있었지만 내겐 그곳에 들어갈 힘이 없었소. 난 색이나 빛을 위해 만들어진 인간이 아니라는 걸 당신도 알거요. 그래서 우리는 서로 좋아하긴 했지만 결코 다른 사람들이 있는 그 피안의 영역의 문지방을 함께 넘어설 수는 없었던거요. 당신은 내 인생을 승인할 수 없었을거요. 당신의 인생과는 너무 달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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